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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는 너무 잔인해서 단 한번도 집행된적이 없다는 중국의 형벌 (텍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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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는 너무 잔인해서 단 한번도 집행된적이 없다는 중국의 형벌 (텍혐주의) | 인스티즈

 



한국사에서는 너무 잔인해서 단 한번도 집행된적이 없다는 중국의 형벌 (텍혐주의) | 인스티즈




처참 (陵遲處斬)


- 집행방법 -

1. 너무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쇼크사로 먼저 사망하지 않도록 치사량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의 아편을 복용하게 한다. 그 다음 혀를 깨물지 못하게 나무 공을 입에 물린다.

2. 죄인을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어 고정시킨 후, 면도칼처럼 생긴 얇은 도검으로 사형수의 온몸을 회를 뜨듯이 조금씩 생살을 발라낸다.

3. 먼저 손가락이나 발가락과 같은 덜 치명적인 말단을 발라낸 후 관절을 부수고, 팔과 다리를 발라내고, 관절을 부숴서 목숨에 덜 치명적인 부분을 모두 발려낸 후 몸통 살을 발라낸다. 죄인이 과다출혈로 일찍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상처 부위에 진흙 등의 물질을 발라서 출혈을 막으면서 칼질을 했다고도 한다.

4. 마지막에는 심장을 뚫으며 죽인다.


집행 기간이 대개 2박 3일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이렇게 함으로써 수형자의 고통을 극대화하고 보는 군중들에게 구경거리를 주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형이 집행될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도시락까지 싸들고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형이 집행되기 전후로 주변 식당과 매점의 매출이 급증한 건 덤. 거기다 집행자는 사람들이 외치는 부위를 발라내는 쇼맨십까지 선보였다



흔히 한국에선 죄인의 팔다리를 말이나 소 등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을 처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형벌은 거열형(車裂刑)으로 본래 엄연히 다른 형벌이다. 조선에서는 처참으로 판결이 나와도 거열형으로 순화시켜서 집행했고,그나마도 대부분 참형에 처한 뒤 시체만 거열형에 처하듯이 사지를 절단하는 식이었다.

가장 마지막 집행은 1905년 4월 10일, 베이징에서 이루어졌으며, 사형수는 내몽골 왕자의 근위병으로서 그를 암살한 죄로 사형이 집행된 18세의 만주족 청년 푸주리(富珠哩). 원래 몽골 측은 산 채로 불태워 죽일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청 황제였던 광서제가 그건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대신 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사상에 의거, 시신의 원형이 조금이라도 유지되고 나중에 수습이라도 가능한 형이 아예 재가 되어 온전히 묻힐 수도 없는 화형보다는 그나마 인간적인 처벌이라고 봤기 때문.

이 집행 장면이 당시 베이징에 체류 중이던 서양 선교사의 카메라에도 담겼고, 후에 유럽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당연히 이 사진을 근거로 당시 서양에서 중국을 전근대적이라고 엄청나게 깠다. 참고로 이 사진은 구글에 'Fou Tchou-Li'라고 이름만 검색해도 볼 수 있으며 그리 잔인하지는 않으나 팔이 잘리고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이 여실히 담겨 있기에 조심.


- 이 형벌을 받은 사람들 -


강조 - 산 채로 형을 당했으나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고 거란에 굴복하지 않자 결국 참수당했다.

고영상 - 이자성의 난 때 반란군 지도자 중 한 명

시황제의 공주들 - 진시황제 사후 이세황제가 즉위했을 때 자신의 형제자매를 모조리 숙청했는데, 그 중 자신의 누이 10명은 사지를 절단하는 방식으로 처형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건 시황제의 무덤이 발굴될 때 사지가 잘린 흔적이 역력한 여성 유골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당시의 잔혹한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왕아종 - 1797년에 청나라에 대항해 거병한 포의족 여성 지도자. 청군에 패하여 생포된 후 북경으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20세의 나이로 처참에 처해졌다.

프랑스 선교사들 - 아마도 청나라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톨릭이 굉장히 지독한 악교(惡敎)였던 모양이다. 물론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유근 - 명나라의 악질 환관. 백성들을 괴롭혀 상당히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 인민일보와 아시아판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과거 제일 많은 부를 축적한 인물로 꼽힐 정도였다

명나라 가정제 때의 궁녀들 - 1542년, 가정제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정제를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인 임인궁변(壬寅宮變)을 일으킨 궁녀들이다. 여기에 후궁 영빈 왕씨와 단비 조씨까지 연루되어 사건 직후 모조리 저자거리로 끌려가 처참을 당하고, 수급과 회떠진 살점들이 거리에 전시되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 석달개는 태평천국의 중심인 난징에서 이탈한 뒤 지지자들을 데리고 사천지방으로 가서 태평천국 운동을 이끌었지만 결국 관군에 체포되어 형을 당해 죽는다. 이때 수하들과 함께 형을 당했는데 형을 당하던 수하들이 고통에 못 이겨 신음소리를 내자 "그까짓 통증이 뭐라고 신음소리를 내어 긍지를 버리느냐"고 호되게 꾸짖었고, 자신이 형을 당해 뼈와 살이 발라질 때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이걸 지켜보던 청나라 관리들이 "과연 천하를 어지럽힌 수괴답다"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심지어 15살에 불과했던 홍수전의 아들도 처참에 처해졌는데, 천번이 넘는 횟수의 칼질을 하루종일 당하는 동안 그 울음소리가 집행 과정 내내 흘러나왔다고 한다.

유복만, 김장손 - 조선 말기 임오군란 지도자. 청나라군에게 붙잡혀 군기시에서 처참된다.

한국 역사에서는 공민왕 때부터 처참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때에 많이 집행되었다고 하는데, 중국과 달리 거열형으로 대체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참수형으로 먼저 죽인 뒤, 시신을 절단하는 과정만 추가하는 것으로 흉내만 냈다.

죄인을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중국의 형벌 팽형도 조선에선 가마솥에 넣고 잠깐 끓이는 척했다가 도로 꺼내 흉내만 내는 등 참혹한 형벌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은 국가였다. 이 외에도 중국에서 행해지는 형벌의 상당 부분이 조선에선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시늉만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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